2017년 10월, 한국의 인천 송도에서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 (ASEAN) 10개국과 한중일 3개국, 호주, 뉴질랜드, 인도 등 총 16개국 대표가 참여하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 제 20차 공식 협상이 있었습니다. RCEP는 참여 국가들 간 관세 장벽 철폐를 목표로 한 일종의 다자 간 자유무역협정 (Free Trade Agreement) 인데, 타결될 경우 역내 인구 34억명, 무역규모 10조 달러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경제 블록이 탄생하게 됩니다.
제20차 RCEP개막식에 앞서 의사와 언론인들로 구성된 독립 국제 인도주의 의료 구호 단체인 ‘국경없는의사회’가 성명을 발표했는데, 한국과 일본 정부를 향해 적정 가격으로 형성된 복제약의 전세계 접근성을 저해할 조항들을 RCEP에 포함시키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RCEP 참여국들 중 한국과 일본이 기술과 지적재산권 보유 관련 선진국에 속하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을 향해 자국 제약사들을 위한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 정책을 포기하라며 경고에 나선 것입니다.
RCEP에 인도가 포함된 것이 국경없는의사회의 관심을 끈 계기가 되었습니다. 인도는 2005년 전까지 의약품 특허를 허가 해 주지 않아 전세계의 복제약 공장으로 불리었습니다. 즉, 의약품에 대한 독점권을 특정 기업에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인도의 수많은 제약회사들이 선진국의 거대 제약사들의 견제 없이 자유롭게 약을 복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에이즈 (HIV/AIDS), 말라리아, 결핵 관련 치료제를 아주 싼 가격에 제조해 전세계로 수출해왔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에 따르면 인도의 무 특허 정책으로 인해 에이즈 치료제의 가격이 미화 만불에서 이백불까지 낮아졌고 이 혜택은 인도 제약사들 뿐만 아니라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에이즈 환자들에게도 돌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인도가 세계무역기구 (WTO)에 가입하면서 자연스레 협약국에게 지워지는 특허 보호 의무로 인해 인도도 의약품 관련 특허를 허가해주게 되었고, 이에 거대 다국적 제약사들은 앞다퉈 인도에 특허 신청을 시작했습니다.
의약품 관련 특허의 보호 기간은 통상 25년이지만 실제 제약 회사들은 신규 화합물에 대한 조성물의 일부를 변경하는 방법으로 후속 특허를 지속적으로 출원하여 꼬리에 꼬리를 무는 특허 등록을 통해 권리 기간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소위, ‘에버그리닝 전략(evergreening strategy)’을 택하고 있습니다.
오리지널 신약 보호에 대해 관대한 선진국과는 달리 대부분의 의약품의 대부분을 전량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는 개발도상국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제약사들의 에버그리닝 전략을 막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인도에서는 의약품 특허 획득 요건으로 ‘강화된 효능’ (enhanced efficacy) 조건을 추가하여 에버그리닝 목적의 특허 출원을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실 제약사들의 입장에서는 천문학적인 금액과 오랜 기간의 연구 개발을 거쳐 개발한 신약의 수확을 최대한 오랜 기간 누리고 싶을 것입니다. 제약회사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투자자들의 눈치도 한 몫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특허 독점을 통해 의약품 가격이 높게 형성되어 개발도상국의 국민들이 생명의 위협이 되는 병에 걸려도 약값이 비싸 치료받지 못한다면 이는 전세계적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무역기구의 지적재산권 관련 협정 (WTO TRIPS Agreement) 상에는 가입국의 정부가 공권력을 행사하여 특허권의 강제 라이센스 (compulsory licence)를 허가해 줄 수 있는 규정이 있습니다. PPI (Patented Pharmaceutical Inventions) 라고 하는 의약품 관련 발명에 관해 제약사가 법원의 허가를 얻으면 개발도상국에 수출할 인도적 목적에 한해 특허 대상 의약품을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호주의 특허법 (Patents Act 1990)에서도 이 TRIPS 조항을 받아들여 PPI의 강제 라이센스를 가능하도록 하는 규정이 있는데 이를 통해 특허 보호 대상의 의약품을 복제해도 특허권 침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조항은 국가가 보장한 특허권자의 독점권 침해를 국가 스스로 용인해주는 것으로 법원에서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한해 이를 승인해 줍니다. 즉, 수출하고자 하는 개발도상국에 국가 비상사태에 준하는 병이 창궐했거나, 수출된 복제 의약품이 월드비젼 등 비영리 자선단체나 국가기관에 의해서만 사용하는 등의 조건이 붙습니다. 또한, 수출 가능한 개발도상국도 정해져 있는데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와 캄보디아, 미얀마와 같은 아시아 국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법원에 의해 PPI 강제 라이센스가 허여되어도 특허권자가 무상으로 이용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고 사용료 관련 적절한 보상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작성자: 김현태 호주변호사, 상표변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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